목동예술인센터–권용준 미술사
<러시아의 사실주의>
6월 12일(목) 오전 10시30분 – 12시 30분
미술아카데미 6층
수강료 25,000원
수강신청 : 02-2655-3113
러시아 사실주의 예술 : 격동기의 예술과 이데올로기
1. 사회, 민중과 함께 한 러시아 미술의 특징
19세기 중후반의 러시아는 전통적 왕정과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역사적 대 전제 앞에서 격동과 변화의 시간 속에서 형성된 역사를 지닌다. 그러나 계층과 이념을 초월해서 러시아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고뇌의 흔적은, 톨스토이의 말처럼, “진실하게 사는 것 혹은 더욱 중요한 것은 러시아에서 진실하게 하는 것”에 대한 열망에 새겨져 있다.
이런 러시아 특유의 고뇌에 비친 격렬한 삶의 흔적인 예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19세기 농노제도와 차르의 강압에 의한 정치체제에서도 예술가들은 인텔리겐차로서 사회와 민중에 대한 사명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였다.
이 시기의 미술가들은 전형적인 구상성(형식주의)을 통해 민중의 삶과 심정, 노동, 염원 등을 진솔하게 노래했으며, 농노제 폐지 이후 사회의 삶이 부조리한 길로 들어서면서, 국가와 사회, 자본과 종교의 타락을 우의와 풍자의 필치로 드러냈다.
2. 이동파의 등장
1870년 옛 러시아에서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i)에 의해 제창된 미술운동이다. 이 운동은 1863년 가을 14명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 학생들이 아카데미의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교육에 반기를 들고 작품 창작 시 주제를 선택할 권리, 즉 창작의 자유를 요구하며 아카데미를 집단 탈퇴한 것에서 발단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러시아 미술사에서 ’14인의 반란‘이라는 명칭을 얻으며, 이동파의 탄생을 예고했다.
1870년 크람스코이와 비평가 스타소프(Vladimir Vasilievich Stasov)의 전격적인 합의로 ‘이동 전시 협회‘를 결성함으로써 마침내 미술사에 ‘이동파‘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동파는 동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러시아 지방 곳곳을 순회하며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운동은 특수한 몇몇 사람이 아니라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미술계의 브나로드 운동이었다.
이동파의 목표는 예술을 관료행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예술을 통해 민중을 교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미(美)에 대한 탐구보다 사회적, 윤리적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다. 화풍도 대중에게 더 잘 어필할 수 있는 사실주의를 지향했으며, 삶의 진실이라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 시켰다. 이들 작품은 시골과 도시의 일상생활 장면이 주요 테마가 되었고, 일상과 축제 속의 농민과 도시민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주요 활동 작가로는 크람스코이를 비롯해 니콜라이 게(Nikolai Ge), 그리고리 마소예도프(Grigoriy Myasoyedov), 일리야 레핀(Ilya Repin), 바실리 막시모프(Vassili Maximov),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Surikov), 이반 시슈킨(Ivan Shishkin), 바실리 폴레노프(Vasily Polenov), 이삭 레비탄(Isaac Levitan), 발렌틴 세로프(Valentin Serov) 등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핵심 인물들이 참여했다. 이동파는 1923년 마지막 전시를 갖고 혁명 정부 하에서 조직 개편을 위해 해체되었다. 정부의 후원 없이 거의 반세기 동안 지속된 이 그룹의 사상과 작업은 후대의 러시아 미술과 서구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 러시아 미술에 나타난 일상의 스토리
(1) 파벨 페도토프(Pavel Andreyevich Fedotov. 1815-1852)
러시아의 풍속화가. ‘러시아의 호가스‘로 알려질 만큼 19세기 중엽 러시아 민중의 삶을 특유
1815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은퇴한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제1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근위대에 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밤에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드로잉 수업을 청강했다. 1843년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 10년간 복무하던 부대에 전역을 신청하고 화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파벨 페도토프는 제대 후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하여 그림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있는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초상화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료했다. 특히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데 탁월했으며, 삶 속에 녹아 있는 진솔한 모습을 담아내는 것에 열중했다.
페도토프는 1846년부터 유화로 작업을 시작했다. 이전에는 연필과 수채화를 이용했었다. 그는 유화를 재료로 하여 러시아 민중의 삶을 담아내는 풍속화를 그려 나갔다. 여기에는 19세기 중반 러시아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와 비평이 짙게 깔려 있다. 당시 진보적인 문필가 및 평론가들과 어울렸던 그는 그림으로 삶의 진실과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다. 비록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바탕에 두고 있지만 그의 그림은 위트와 유머로 웃음을 짓게 한다. 페도토프는 1852년 37세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정신 병원에서 사망했다.
2. 바실리 푸키레프(1832~1890)와 <어울리지 않는 결혼>
한 커플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신랑과 신부의 조합이 좀 어색하다. 신랑은 70세가 넘은 것으로 보이는데, 신부는 20대의 꽃다운 모습이다. 불평등하며 무엇인가 정략적인 것 같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횡행했던 돈과의 결혼, 그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나이든 고관이 가난한 집의 어리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부인으로 들이는 관행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장면은 결혼식의 하이라이트인 사제가 신부에게 반지를 끼우려는 순간이다. 그런데 사제의 손에는 성경책만 달랑 들려있는 것이, 성스런 결혼식을 위한 준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많이 늙고 꾸부정한 사제가 정식 결혼식보다는 어서 반지나 끼우고 보자는 속셈인 것 같다. 이는 신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신부를 옭아매려는 행위로 보인다.
손을 내민 신부는 우울하다. 결혼식을 앞두고 펑펑 울었는지 얼굴은 부었고 눈은 벌거며,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혔다.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한 마음과 내캐지 않는 결혼의 의미가 기울어 들린 촛불에 나타나있다. 그러나 신랑의 자태는 당당하다. 제국을 위해 공을 세운 흔적으로 목과 가슴에 메달과 훈장이 번쩍이고 있다. 그리고 어린 신부와 새롭게 꾸밀 가정에 대한 새로운 희망인지 촛불이 꼿꼿하게 들려져 있다. 그러나 우울한 신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영 만족스럽지 못한지 곁눈질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왼편의 노파가 심상치 않다. 아마도 죽은 전처의 망령으로 불행의 상징은 아닌가?
주위의 인물들 표정도 각양각색이지만, 모두 어울리지 않는 결혼에 대한 각자의 반응이다. 하객 중 가장 오른편의 팔짱 낀 사내가 화가 자신으로, 이런 결혼의 세태를 고발한다는 의지를 드러낸 듯하다. 신부의 화관과 드레스의 꽃은 은방울꽃이다. 맑고 깨끗하기에 ‘성모의 눈물’로 불리는 꽃으로, 행복과 순결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이 꽃이 상징하듯 이 결혼이 과연 행복할 것인가? 도스토예프스키도 그의 『죄와 벌』에서 이런 정략적 결혼의 부패상을 묘사했듯이, 돈과 권력을 앞세운 이런 강압적 결혼은 곧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으며 한 인간을 불행의 나락으로 추락시키는 제도이듯, 화가 바실리 푸키레프(1832~1890)는 이 그림을 통해 제정 러시아 시대의 부조리한 사회의 일면을 고발하고 있다.
3. 바실리 페로프(Vasily Grigorevich Perov. 1833-1882)
도스토옙스키, A.오스트로프스키의 초상화 등을 그린 러시아의 화가로, 비판적 리얼리즘을 통해 사회의 악을 비판적,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성직자의 타락을 폭로한 <부활절의 마을 십자가 행렬>을 비롯하여 통렬한 풍자와 사회적 항의의 자세가 역력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반관전(反官展) ‘이동파(移動派)’와 함께 행동했다.
4.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 1837-1887)
러시아의 화가이자 미술 비평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 그룹인 ‘이동파‘의 수장이었으며, 일리야 레핀과 야로센코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 낸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185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863년 아카데미 졸업 작품 주제에 반발해 다른 13명의 학생들과 함께 작품 주제 선정의 자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졸업 직전 아카데미에서 나왔다. 스스로를 ‘14인의 반란자’라 칭하며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을 결성한 이들은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공동체 생활에 들어갔다.
1870년 이반 크람스코이는 비평가 스타소프(V.V. Stasov)와 전격적인 합의로 ‘러시아 이동 전시 협회’를 창립하였다. 여기에는 일리야 레핀(Ilya Repine),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Surikov),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이사크 레비탄(Isaak Levitan) 등 19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러시아 화가들이 참여했다. 이 그룹은 여러 도시를 이동하면서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이동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몇몇 특수한 사람만을 위한 미술 전시회가 아닌 모든 사람이 함께 미술품을 감상하고 즐기자는 취지로 거의 해마다 개최된 이 전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지었다.
이반 크람스코이는 시대에 대한 의무와 정의감에 넘치는 인물들을 주로 그렸다. 1873년에 발표한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화는 위대한 사상가의 결단과 강인한 정신이 크람스코이 특유의 한색 계열의 색감으로 표현되었다
* 이동파(Peredvizhniki, 移動派)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사실주의 미술운동 그룹으로, 창작의 자유와 예술을 통해 민중 교화를 목적으로 1870년에 설립되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교육에 반발하여 창작의 자유와 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역점을 두었으며, 러시아 민중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작품 제작과 순회전시를 주된 활동으로 삼았고,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핵심 인물들이 참여했다.
이동파의 목표는 예술을 관료행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예술을 통해 민중을 교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미(美)에 대한 탐구보다 사회적, 윤리적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다. 화풍도 대중에게 더 잘 어필할 수 있는 사실주의를 지향했으며, 삶의 진실이라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 시켰다. 이들 작품은 시골과 도시의 일상생활 장면이 주요 테마가 되었고, 일상과 축제 속의 농민과 도시민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이동파는 1923년 마지막 전시를 갖고 혁명 정부 하에서 조직 개편을 위해 해체되었다. 정부의 후원 없이 거의 반세기 동안 지속된 이 그룹의 사상과 작업은 후대의 러시아 미술과 서구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 여인이 마차 위에 도도한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여인을 올려다 봐야 할 위치에 있으며, 검고 큰 눈, 날카로운 콧날, 짙은 눈썹과 검정 머리에 멋진 모자를 쓴 이 도도한 여인을 경외심으로 떠받들 수밖에 없다. 한 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자태의 아름다움이지만 그 당당함 속에 치명적인 관능 또한 도사리고 있기에 한 번 보면 그 매력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관능은 촉촉하게 젖은 슬픈 눈과 도톰하고 붉게 물든 입술 때문에 더 큰 위력을 발산한다. 도도함, 관능, 슬픔의 아름다움을 전부 가진 이 여인이 누구일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제정 러시아의 ‘이동파’라는 유파를 이끌었으며, 날카로운 지성으로 제정 러시아의 체제와 부조리를 강하게 비판한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 1837-87)이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는 그였지만, 이 그림 속 여주인공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아 ‘미지의 여인’으로 불린다. 그러나 크람스코이와의 각별한 관계를 근거로 하며, 이 화가가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릴 때 대문호는 <안나 카레리나>를 집필 중이었고, 그가 크람스코이를 모델로 영민한 화가 미할코프를 창조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 여인을 톨스토이의 여주인공 안나 카레리나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소설 속에서 안나가 브론스키를 처음 만날 때 묘사된 모습이 회색 눈동자에 벨벳 드레스 차림의 바로 이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차디찬 눈발 속에 흐리게 감추어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마차에 오른 여인 옆의 빈자리는 그녀가 사랑한 브론스키의 자리일까? 간절한 사랑의 기다림이기에 이 여인이 이토록 아름답단 말인가? 사랑의 열정에 도취되어 자신의 현재를 잊고 내일을 향한 행복한 모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여인이 안나라면, 이 모습이 바로 그 여인을 닮았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비록 그 끝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지독하게 아름답고, 손을 데일 것 같은 사랑의 열정에 들뜬 이 여인은 세월과 함께 이미 추억의 뒤편으로 사라진 우리의 강렬했던 사랑의 꿈, 도저히 잊을 수 없었던 사랑의 모습을 되살려주는 것 같다. 바로 우리의 내면에 작은 불씨로 존재했던 애틋했던 사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되새겨주는 여인이기에 그 당당하면서도 치명적인 사랑의 이미지에 모두가 감동을 금치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5. 니콜라이 야로센코(Nikolai Alexandrovich Yaroshenko. 1846-1898)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인 폴타바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자신도 군인이었다. 군인생활 중 틈틈이 크람스코이 드로잉학교에서 미술수업을 받고, 상크 페테르부르크 왕립미술 아카데미의 청강생으로 그림을 공부하였다.
군인이자 화가였던 야로센코는 1875년 이동파 전시회의 참가를 계기로 1876년 이래 이동파의 적극적인 멤버로 활약하였다. 1880년대 초 크람스코이가 이동파를 떠나자 실질적 리더가 되었다.
작품의 주제는 러시아 지식인의 초상화와 혁명에 우호적인 학생들을 즐겨 그렸는데, 이에 대해 레닌은 ‘현실생활의 뛰어난 심리분석자’라는 평을 들었다. 당시 러시아가 지녔던 사회적 테마와 풍속화를 즐겨 그려서 야로센코는 19세기 마지막 20년간 사실주의적인 작품으로 러시아 최고의 화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는 1892년 전역한 뒤 폴타바와 체르니하우 지방에서 지내다가 1898년 키슬로보스크에서 폐결핵으로 52세에 사망하게 된다.
6. 일랴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1930)
러시아의 화가.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이라 불린다. 중량감 있는 구성과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화면 속에 러시아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담았으며,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내면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레핀은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술장려협회의 미술학교에서 데생 교육을 받았으며, 186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의 평생의 스승인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를 만났다. 크람스코이는 이동파를 이끈 지도자이자 시대를 주도하는 예술가로 그는 레핀에게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각인시켰다.
레핀은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아카데미 졸업 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그는 이것으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취득했고, 우수 연수생으로 6년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레핀은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유학을 미룬 채 이 장면을 그리는 데 매달렸다. 3년 뒤에 탄생한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각각의 인물 속에 개성 넘치는 성격과 다양한 삶의 흔적, 강인함과 절망, 비극적인 러시아의 상황을 담아낸 수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레핀은 1873년 5월 유럽으로 향했다. 비엔나, 베니스, 로마를 방문한 그는 유럽 문화의 수도라 할 수 있는 파리에 자리를 잡았다. 1874년 파리에서는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레핀은 인상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예술의 흐름과 창작의 자유에 대해서는 옹호했다.
1882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옮긴 레핀은 이동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이동파는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여러 도시로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러시아 사회를 통찰력 있게 묘사한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은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레핀은 이 시기에 혁명을 주제로 한 역동적인 삶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삶 속에 내재된 다양한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유형지에서 고향의 집으로 돌아온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 간의 긴장된 심리 상황이 날카롭게 포착되어 있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1901년에는 러시아 국가 의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프로젝트를 의뢰받았다. 레핀의 마지막 대작이 된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회의》를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핀은 오른손 관절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왼손으로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이전의 명성에 걸맞는 작품에는 미치지 못했다. 레핀은 생애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보냈다. 그리고 1930년 9월 29일 그곳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레핀이 거주하던 쿠오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1948년 레핀의 이름을 따 ‘레피노’로 개칭되었다.
시인들 초상 : 세프첸코와 네크라소프의 시 – ‘혁명의 지렛대’
슈타인벤의 그림 : 십자가에 박혀 골고다 언덕에 매달린 예수를 새긴 판화로, 민중을 위한 희생을 주제로 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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