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예술인센터 미술아카데미 Gallery TalkTalk 2월 13일 수업후기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예술작품에 대해
강의를 요약하자면 근대물질문명, 의회 민주주의 등 영국 최고의 시기에 나타난 미술로, 다른 분야는 풍성한 시기였지만 미술은 거의 죽은 시대나 마찬가지인 시기에 그나마 라파엘 전파가 미술을 이끌어주었지만 미술사의 큰 주류는 아니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시대의 미술은 너무 형식적이어서 상상력이 없고, 겉멋만 있다고 생각한 이들은 예술은 내용 속에 도덕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 더해 자연에 대한 겸허한 자세 가 있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결국 이상적인 르네상스의 이념인 해부학이나 비례가 나타나지 않은 이전시대, 중세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못 그리는 사람이 그린 그림처럼 보이며, 라파엘 전파의 그림 속에는 읽어야하는 도상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어 자세히 봐야 한다.
내용과 도덕은 성서, 신화, 문학 등에서 나타난 상징주의, 자연은 사실주의여서 라파엘전파가 주장하는 내용과 도덕이 자연과는 상충할 수밖에 없는데, 이 3가지를 동시에 나타내기 어려워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디킨스는 개떡 같은 미술이라 혹평하였고, 러스킨은 가장 완벽한 예술이라 칭송했다. 지금도 두 부류의 평론이 지속되고 있다.
예술이란 테크네를 통해 에피스테메(정신)를 담아내는 미메시스(모방)이라 할 수 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에서의 자연이란 중세에서는 신, 르네상스에선 캐논(해부학, 비례 등), 사실주의에서는 이념을 말하는데, 라파엘 전파에서의 자연이란 아름다운 자연이라기보다는 고귀한 자연, 즉 인간이 물질주의로 버려버린 자연을 귀히 여기고 추후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예를 들자면 돌을 그릴 때 그냥 돌이 아닌 태초에 어디서 온 것인지, 어떤 의미, 어떤 흔적, 현재의 상태 등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쉽게 이해하자면 사람 얼굴에 나타난 주름은 그냥 주름으로 보기 보다는 각자의 삶의 흔적으로, 삶의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밀레이 <오필리어>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 오필이어의 배경이 덴마크의 강이었고, 낭만주의가 만들어낸 자유연애사상의 절절한 마음을 표현한 반면, 밀레이의 오필리어는 덴마크의 배경을 영국식으로 바꿔, 강이 없는 영국의 보편적 자연인 개울로 그렸으며, 낭만주의의 자연을 공포로 표현하였다면, 라파엘전파의 자연은 공포스럽지 않은 일상의 자연, 우리가 죽어서 갈 수 밖에 없는 안식처, 엄마의 품과 같은 자연을 표현한다.
영국의 자본주의는 자본가만 누릴 수 있는 것이지 나머지 사람들은 빈곤 속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다. 작품 속의 오필리어는 자본을 누리지 못하는 현대인을 표현한 것으로 그림에 표현된 수많은 꽃들의 꽃말을 통해 오필리어의 비통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물망초는 ‘현실 속 고통은 있지만 품어줄 자연이 있음을 망각하지 말라’로 해석할 수 있다.
오필리어 그림 속 꽃과 꽃말
아이리스 : 날카로운 것, 칼 / 쓰러진 버드나무 줄기 : 버림받은 사랑, 죽음 / 수선화 : 깨진 희망 / 데이지 : 순수한 사랑 / 제비꽃 : 나를 선택해 주세요 / 펜지 : 허무한 사랑 / 쐐기풀 : 고통 / 물망초 : 나를 잊지 말아요
라파엘 전파의 작가와 작품들
(1)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주님의 종이오니! (Ecce Ancilla Domini! The Annunciation)>.
(1849-50년. 캔버스에 유화. 41.9×72.7cm. 런던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19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당시 ‘감상적이고 맥 빠진 예술’, ‘고전 고대나 미켈란젤로 또는 티치아노를 모방하는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예술’ 에 반기를 든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이념의 예술을 주창하였다. 헌트, 밀레이, 로세티 등 ‘라파엘 전파’ 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그들로, 이들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모’에 대해 “진실의 단순함을 무시하고, 열두제자를 호화스런 자태로, 그리스도를 세속적으로 표현” 함으로써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과거 라파엘로 이전의 시대, 곧 현실과 세속의 감정에 물들지 않은 채 겸허한 자세로 자연에 순응하고 그 자연의 진실을 소박하고 참신한 필치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그림의 내면은 성경, 신화, 문학 작품을 통해 얻은 깊은 정신적 의미로 가득해, 현실과 감각이 지배하는 물질과 현실 세계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일깨우고 있다. 이
들 가운데 특히 환상적 표현에 대한 흥미와 독특한 묘사기법을 통하여 훗날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였으며, 시인으로도 명성이 높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년) 의 성화 <주님의 종이오니!(Ecce Ancilla Domini!)>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1848-49년. 캔버스 위에 유화, 83.2×65.4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의 후편이자 쌍을 이루는 성화로, 이 두 그림이 로세티가 그린 유일한 성화이다.
<주님의 종이오니!>를 보면, 그 주제가 루카 복음 1장의 ‘예수 탄생 예고’ 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얼핏 보더라도 수태고지를 주제로 다룬 과거의 수많은 그림들과는 사뭇 다르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마리아에게 접근하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커다란 날개를 단 근엄하고 위압감 있는 자태를 볼 수 없다. 오히려 가브리엘의 모습이 다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하느님의 말씀과기적은 평범한 일상, 우리가 영위하는 오늘의 삶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처녀인 자신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가브리엘의 말을 듣는 마리아 또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라는 경건한 자세로 담담한 순종의 믿음을 보이는 위대한 종교적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믿기지 않는, 한 인간이 감내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가브리엘의 말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보인 채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 하는 한 나약한 여인으로서 마리아의 모습, 의심하고 당황하며 갈등하는 가련한 인간의 이미지를 선택해서 그렸다. 또한 침상 위의 잠옷 차림으로 부끄러움에 몸을 움츠리는 조신한 여인의 자태와, 여인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에스(S) 자의 율동미, 곧 콘트라포스토의 각선미로 나타난 것이, 마리아 역시 일상의 현실에서는 예쁘게 보이기를 원하는 소박한 여인임을 표현한 것 같다. 이처럼 우리의 성모님은 초월적 존재라기보다는 내가 오늘 경험하고 나와 다름없는 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 또한 내가 사는 일상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증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리아가 이런 우리의 현실에 존재하는 평범한 여인임을 의미하는 것을 그녀 앞에 놓인 수예품, 그녀가 완성해서 세워놓은 바느질의 결과물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붉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수를 놓은 것은 순결을 상징하는 마리아의 꽃 백합으로, 마리아와 천사의 옷을 비롯해 그림 전체에 감도는 흰색 이미지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 꽃이 지금 천사 가브리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마리아에게 내미는 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림 속 이 꽃들의 형상이 단순한 상징적 도상이 아닌, 꽃잎과 수술 등 충실한 관찰을 토대로 그려져 있다. 바로 천상의 모후로서보다는 현실 속 평범한 일상의 여인인 마리아의 이미지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특히 로세티가 이 그림에 대해 적은 시에서 마리아를 “신의 곁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는, 천사 – 백합” 으로 표현하는 것이, 백합과 마리아의 연관성을 더욱 강하게 전해준다. 천사가 전하는 백합 위에 날고 있는 비둘기는 성령을 의미하는 전통적 도상으로, 이 사건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리아의 침대 뒤편의 푸른색 가리개는 종교적 열정을 암시하는 자수를 놓은 붉은색 천과더불어 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으로, 아름다운 아름다운 꿈을 지닌 평범한 처녀의 맑고 깨끗한 내면을 의미한다.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성모의 어린시절>. 1848년. 캔버스 위에 유화. (65.4×83.2cm. Tate)
벽면의 등잔불은 흔히 약혼녀나 신부에게는 임신을 바라는 마음으로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하느님께 순명하는 마리아의 신앙과 결부시킬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리기 1년 전에 그린 <성모 마리아의 어린시절>에서는 마리아가 어머니 안나 성녀의 도움을 받아 수를 놓는, 이른바 신부 수업을 받는 소녀 곧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루카 1,26-27 참조) 의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는데, 붉은 바탕에 완성되지 않은 백합이 ‘주님의 종이오니!’ 에서는 완성되어 세워져 있다.
이 그림의 창밖 정원에는 마리아의 아버지 요아킴 성인이 있는 것이 한 평범한 가족의 이미지로 성가족의 의미를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의 중앙 화분에도 백합이 자라고 있으며, 정원의 비둘기 역시 성령의 상징이다. 창의 난간 위에 걸쳐진 붉은 옷은 그리스도가 수난 때 입었던 옷을 나타내며, 안나 뒤의 담쟁이덩굴이 감긴 지지대의 모습은 십자가이다.
특히 로세티는 자신의 시에서 책을 성모 마리아의 미덕으로, 백합은 순결함을, 일곱 개의 가시가 있는 찔레와 일곱 개의 잎이 있는 종려나무는 성모 마리아의 “크나큰 슬픔과 이에 대한 큰 보답” 으로 노래한 것이, 그림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런 전통적 도상에도 당시의 일부 평론가들은 성가족을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린 데 대해 비난을 쏟아 부었으나, 이 그림은 실상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게 일상의 삶을 통해 전해지고 이루어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로세티가 이렇게 행한 화필의 자국을 보면서 내 오늘의 일상,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전해지는 숭엄한 말씀을 경청할 자세가 되었는지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쯤 되면, 로세티가 라파엘로 이전의 화풍을 통해 자연의 위대함을 드러내고자한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경건한 말씀 앞에 있는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교시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럼에도 ‘주님의 종이오니!’ 가 원근법과 사실적 표현기법이 서툴다는 이유로 로세티에게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충격을 받아 평생 대중 전시회에 출품하기를 거리끼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2)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성스런 베아트리체(Beata Beatrix)>
(1864-1870년. 캔버스에 유화. 86.4x66cm.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로세티는 자신의 모델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을 끔찍이도 사랑한 나머지, 청혼은커녕 사랑의 고백조차 엄두도 못낸 사내이다. 그런 망설임과 갈등의 10년이 지난 뒤, 급기야 결혼을 했지만 1년 뒤 아이를 사산하면서 아내는 우울증과 약물중독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과도한 아편복용으로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림 속의 엘리자베스는 고고한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상념에 젖은 모습과 이목구비가 반듯한 숭고미가 인상적이다. 특히 그녀는 뒤에서 받는 황금빛 후광 덕에 머릿결에 붉은 기운이 도는 것이 마치 성녀를 연상시키는데, 한 사내의 마음에서 우러난 간절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그녀의 오른편에는 금빛 원반의 해시계가 있는데, 이는 유한한 삶 혹은 죽음을 나타내는 도상이다. 그리고 죽음의 전령사인 붉은 비둘기가 후광을 두른 채 양귀비꽃을 엘리자베스의 두 손에 떨구고 있다. 이 여인의 죽음이 아편과 연관되었음을 암시한 것이다. 배경의 양편에 환영처럼 표현된 두 남녀는 서로 죽음으로 헤어지는 상황을 연출하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모습이다. 그러니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아내와의 사별을 단테와 베아트리체라는 지극히 아름답고 완전한 사랑과 이별로 포장을 한 것이다. 이런 애틋한 마음에서 그림의 제목도 <성스런 베아트리체>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에게 닥친 죽음의 실상은 로세티가 파니라는 매춘부와 밀회를 즐기기 위해 집을 나간 이후였다. 남편의 잦은 외도에 대한 실망과 절망감에 과다한 아편을 복용한 것이 사망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그림이 보이는 애절한 사랑의 감정은 씻지 못할 남편의 죄책감이 덧칠되었기에 더 비통하게 보이는 것 같다.
(3) 프레더릭 레이턴 경. <화가의 허니문(The Painter’s Honeymoon)>.
(1864년경. 캔버스에 유화, 83.8×77.5cm. 보스턴 미술관)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가장 감미로웠던 순간을 떠올린다면 결혼의 황홀한 기쁨과 신혼시절의 꿀 같은 달콤함일 것이다.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고, 나 스스로 배우자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완전한 이상의 보금자리를 꿈꾼 순간 말이다. 세상 모든 근심과 시름을 잊은 채, 오직 달콤한 사랑만이 막 결합한 두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영국 빅토리아 시대 프레더릭 레이튼 경(Sir Frederic Leighton. 1830~1896)의 <화가의 허니문>이다.
햇살이 가득한 어느 시간, 신혼의 화가가 화판을 들어 그림에 열중하고 있다. 자신의 일에 몰입한 남편을 바라보며 지극히 사랑스럽고 소중한 마음이 발동한 아내가 얼굴에 볼을 대며 몸을 밀착한다. 남편의 작업을 방해하는 아내지만, 오직 사랑의 이름만으로 남편에게 기대는 신부의 천진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신혼의 여인답게 잘 차린 긴 드레스와 멋지게 가다듬은 금발의 풍성한 머릿결이 화려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 여인의 드레스를 적신 부드럽고 화사한 빛이 사랑의 열기에 도취된 신부의 황홀한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아무 말 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작업에 열중한 모습이지만, 남편은 살며시 몸을 들이미는 아내를 몸으로 맞으며 손을 꼭 쥐어준다. 서로 맞잡은 손에서 지극한 신뢰감, 부부의 깊은 정이 묻어난다. 그런 남편의 마음을 감지해서인지, 아내는 화판에 눈을 두었지만 눈을 살며시 감고, 입에서는 감미로운 신음이 새어나오는 듯하다. 바로 사랑의 도취가 아니고 무엇이랴. 신혼의 달콤한 행복이 뒤편의 화분에 열린 금빛 오렌지에 나타나 있으며, 그 싱싱하고 강하게 뻗은 초록빛 줄기와 이파리는 행복이라는 결실을 위한 두 사람간의 무한한 신뢰요 깊은 정이자 변치 않는 마음의 징표일 것이다.
이 그림은 모든 부부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있든, 세상에서 가장 황홀하고 행복했던 순간을 되새기고 추억할 수 있는 아름답고 정겨운 믿음과 신뢰의 시간으로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4) 윌리엄 홀먼 헌트의 <깨어나는 양심>
(1853년. 캔버스 위에 유채, 74.3×54.9cm. 런던 테이트갤러리)
한 처녀가 비스듬히 누워 희롱의 눈빛 가득한 중년 남성의 품에서 벗어나고 있다. 방은 매우 호화롭고 사치스럽다. 세련된 피아노와 탁자, 카펫을 비롯해 뒤편의 거울장식을 보니 돈으로 치장된 냄새가 역력하다. 거울 속의 배경이 정원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햇살과 향기를 전하고 있다. 이런 모든 구성이 매우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된 19세기 중반 영국의 빅토리아왕조시대에는 의회민주주의라는 성숙한 정치적 상황과 산업혁명의 성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현세의 가식적 아름다움보다는, 세상과 인생의 진실과 인간의 소박하고 참된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는 열망을 품은 일군의 젊은 예술가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라고 부른다. 이들은 당시 유산자들의 얄팍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허울 좋은 사회의 이면을 다루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그림이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가 그린 이 작품이다.
그림 속의 여인은 신사의 젊은 정부로 성적 노리갯감이다. 발아래의 흐트러진 악보와 실타래가 인간적 타락을 암시한다. 특히 악보는 알프레드 테니슨의 <헛된 눈물이여>로, 이런 삶의 종말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건반 위에 놓은 사내의 손은 여인과 악기를 동일시하는 유희의 풍조를 보이며, 피아노 위의 꽃병에 꽂힌 꽃이 순간의 허영을, 유리병 안의 시계는 일시적인 욕망을 나타낸다. 그리고 나체의 여인이 그 시계를 꼭 끌어안고 있다. 이도 역시 허영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세태를 의미한다. 테이블 아래에는 고양이가 죽은 새를 바라보고 있는데, 고양이는 성적 방종이며 죽은 새는 그 희생자로, 그림 속 두 인물의 돈으로 얽힌 관계를 상징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인이 느닷없이 사내의 품을 재치고 일어서고 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아니면 다른 환희를 맛본 듯 부릅뜬 눈망울을 하고서 말이다. 실제 그녀가 시선을 던진 곳이 거울 속에 비친, 실제 그녀 앞에 있는 정원이다. 그리고 이런 자연을 향한 시선은 곧 자신의 행위에 대한 회의이자 반성이다. 이제 이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 선명하지는 것 같다. 바로 각성이다.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내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가? ‘허무한 눈물’로 지새야 하는 나의 젊은 나날인가?
지금 이 여인의 시선으로 보아, 이 반성과 각성의 순간에 금전의 이익도, 성적 향락도, 물질적 허영도 모두 잊은 듯하다. 오로지 삶의 진실한 가치와 자기 존재의 명분을 찾겠다는 의지만이 선명한 눈빛이다. 이제 이 여인은 붙잡는 남자의 손, 권력과 금권의 손에서 벗어나 스스로 저 아름다운 자연을 향해 발길을 옮길 것이다. 자신의 삶과 자존을 찾아서. 그 길이 실제 힘든 시련의 길일지라도 참되고 아름다운 길이라는 사실을 작가가 당시의 시대상을 토대로 이 작품에 남겨놓고 있다.
<2014년 권용준의 갤톡 일정>
일 자 | 수 업 내 용 | 강 사 |
2월 13일 | 라파엘전파 – 자연과 윤리 | 권용준
미술평론가 고려사이버대 교수 파리3대학 박사 예술의전당 미술사강의
저서 <명화로 보는 서양미술사>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등 |
3월 13일 | 근대 이미지 – 마네와 모네 | |
4월 10일 | 속됨과 성스러움 – 카라바조와 조르주 드 라투르 | |
5월 8일 | 그림 속 모델 – 로댕, 로트렉, 모딜리아니 | |
6월 8일 | 러시아 사실주의 |